등록일2021-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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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공포를 안고 취재합니다”

  • 저자 : 뚠네이소(가명)
  • 발행일 : 2021-06-08

쿠데타 이후 미얀마 군부의 언론 통제가 이뤄지고 있지만 현지 기자들의 목숨 건 취재는 계속되고 있다. 총탄이 날아드는 시위 현장은 겪어보지 않은 이들의 상상을 불허한다. 생사의 갈림길에서도 카메라를 놓지 않는 미얀마 기자의 생생한 증언을 듣는다. 수배 중인 필자의 요청에 따라 가명으로 글을 싣는다. 편집자 주 

 

군부 지도자 민 아웅 흘라잉(Min Aung Hlaing) 총사령관이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미얀마 현지의 뉴스 취재는 어떻게 이뤄질까요? 제 경험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양곤(Yangon)주 산차웅타운십(Sanchaung Township)의 시위를 취재하러 갔습니다. 봄 혁명 초기에 양곤에서 시위대가 많이 모였던 장소는 술래(Sule), 흘레단(Hledan) 교차로, 몌니곤(Myaynigone) 교차로입니다. 군경이 시위대에 총격을 가한 이후부터 시위대는 몌니곤 교차로에서 산차웅타운십 쪽으로 후진해 바그야(Bagaya) 도로에서 시위를 이어갔습니다. 제가 도착했을 때, 사람들은 바그야 도로에서 농성하기 위해 모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도로가 막혀 차가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경로를 바꿔 중앙도로 쪽으로 돌아서 진입했습니다. 아시아로열병원(Asia Royal Hospital)을 지났을 때, 농성하는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도로를 막은 장애물 때문에 더이상 차로 갈 수 없어 트렁크에서 카메라를 꺼내 몸에 메고 걸어갔습니다. 바그야 도로가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이 선명히 보였고, 구호를 외치는 소리도 들렸습니다.

 

“국민의 권력을 국민에게 돌려달라!”, “수치 여사와 대통령을 즉각 석방하라!”

 

옆 골목에서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중앙도로 입구에서 흐르는 물결처럼 행진을 시작했습니다. 몌니곤 교차로에 막 도착했을 때, “펑, 펑” 소리가 4~5번 울렸습니다. 잠시 멍하니 정신을 놓고 있을 때 한 시민이 외쳤습니다.

 

“총을 쐈어. 모두 몸을 숙여”

 

다른 시민이 소리쳤습니다.

 

“총이 아니라, 폭음탄이야. 뛰어, 뛰어!”

 

우리는 뒤돌아 달렸습니다. 군중이 여기저기 흩어졌습니다. 다행히도 도로엔 골목이 많아서 흩어지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저는 한쪽 팔엔 카메라를 메고, 다른 손엔 삼각대를 쥐고 뛰었습니다. 옆에선 젊은이들이 뛰고 있었습니다. 이 Z세대들은 봄 혁명에 가장 앞장서서 시위를 주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시위 경험은 거의 없었을 겁니다.

 

군인들이 계속 쫓아왔습니다. 군화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는 것 같았습니다. 최루탄인지 연막탄일지 모를 폭탄이 뒤에서 터졌습니다.

 

“뒤돌아보지 말고 계속 뛰어!”

 

함께 뛰는 젊은이들에게 소리치며 계속 내달렸습니다. 앞에 좁은 골목 하나가 보였습니다.

 

“동생들, 이리 와. 내 뒤를 따라와!”

 

저는 그들을 향해 계속 소리쳤습니다.

 

“저놈들은 너희를 잡고 싶어 해. 절대 잡혀선 안 돼.”

 

군화 소리, 비명 소리, 욕하는 소리가 머리 뒤에서 들렸습니다. 총성도 이어졌습니다. 공포탄인지 실탄인지를 구분할 여유도 없었습니다. 저는 계속해서 소리쳤습니다.

 

“저놈들이 너희 뒤를 쫓아오는 것 같다. 내게서 떨어지지 마. 내가 이 길들을 잘 아니까.”

 

그러나 앞에 있는 골목으로 들어가자마자 제 예상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군인들이 제 옆에서 같이 뛰고 있는 젊은이를 목표 삼아 쫓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에게 조심하라고 알려주려던 중, 한 군인이 외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거기 카메라 든 놈을 잡아라!”

 

이 말은 며칠 동안 제 마음속에 울렸습니다. 메아리처럼요. 기자가 현장을 취재하는 저널리즘이 미얀마군에겐 심각한 범죄라도 되는 걸까요?

 

그날 저는 운 좋게 달아날 수 있었습니다. 같이 뛰었던 젊은이들에게 “앞으로 나랑 같이 뛰지마. 그들이 잡고 싶은 건 기자였어”라고 말해줬습니다.

 

봄 혁명 초기에는 ‘PRESS’라고 적힌 옷을 자랑스럽게 입고 취재를 나갔습니다. 기자인 내게 총을 쏘지 않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전 세계 어느 군대도 기자를 고의적으로 사살하지는 않을 거니까요. 기자는 민중의 귀이자 눈입니다. 그런데 미얀마 군사독재 정권은 본인들이 저지른 일을 민중이 알 수 없게 저널리즘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있습니다. 이 일 이후 저는 ‘PRESS’ 표식이 쓰인 옷과 모자를 집에 두고 나와야만 했습니다.

 

시위대와의 마찰


또 다른 어려움은 시위대와의 마찰이었습니다. 카메라를 들고 시위대에 다가갔는데 시민들이 제게 의심의 눈길을 보냈습니다.

 

“당신 누구야? 어디 소속이야?”

 

저는 숨겨둔 기자증을 살짝 비췄습니다.

 

“저는 기자입니다. 취재하러 왔습니다. 해외에 이 현실을 알리려 합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이렇게 설명하면 대부분의 시민들은 “알았어요. 취재하세요”라고 허락합니다. 그런데 하루는 달랐습니다. 양곤주 밍글라(Thri Mingala) 시장 근처 시위대에 가서 촬영을 했을 때였습니다.

 

“야, 찍지 마, 찍지 마!”

 

시위 중인 한 아주머니가 저를 향해 소리쳤습니다. 그리고 다른 남성이 화가 난 눈빛으로 저를 쳐다봤습니다. 그러자 열 명 남짓한 시민들이 제게 카메라를 내리라고 소리치며 항의했습니다.

 

“영상 촬영은 안 하고 사진만 찍을게요, 안될까요?”라고 물어봤지만 시민들은 “아무것도 찍지 말고 이곳을 당장 떠나”라고 소리쳤습니다.

 

저는 부끄러움을 느끼며 자리를 떴습니다. 기자가 취재하는 게 무슨 큰 죄라도 됐을까요? 개 쫓겨나듯 배척받을 것까진 없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그들을 탓하지 않습니다. 시민들은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시위하고, 어떤 이들은 쿠데타에 분노해 길거리에 나와 속상함을 표출합니다. 이들은 순수한 시민들일 뿐입니다. 군사독재 정권은 이들의 평화적 시위를 잔혹하게 탄압했습니다. 강제로 잡아가 심하게 고문했습니다. 이들이 두려워하는 건 당연합니다. 기자라는 표식도 없이 카메라를 들이대는 저를 의심할 수밖에요. 이후 취재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고, 더 어려워져만 갔습니다.

 

그때 나를 총으로 쐈다면


군사독재 시대의 취재 행위는 “목숨을 포장지로 싸서 해야하는 일”이란 미얀마 속담 같습니다. 죽을 각오로 하는 일이란 뜻입니다. 취재할 때 기자는 맨 앞으로 나설 수밖에 없고, 죽음과 더 가까워지게 됩니다. 주로 기자는 시위대와 군경 사이에서 촬영을 합니다. 이들이 대치할 때 기자는 중간에 껴버리게 됩니다.

 

어느 날 흘레단시 시위 현장에 취재하러 갔습니다. 상황은 심각했습니다. 군경은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해 물대포차 두 대를 준비했습니다. 그 앞에는 굳은 표정의 군인들이 총을 들고 서 있었습니다. 군인들 앞에는 철조망으로 만든 바리케이드가 있었습니다. 맨 앞에는 ‘첫 번째 경계선’이라고 쓰인 간판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기자입니다. 길 좀 비켜 주세요.”

 

저는 시위대를 비집고 선두에 도착했습니다. 이들은 그 첫 번째 경계선 근처에 모여 있었습니다. 이때 저는 군인들의 눈빛에서 죄책감을 발견했습니다. 사람의 영혼 속에는 정의와 불의를 구별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들은 현재 불의 쪽에 서 있더라도 마음속 정의는 그들에게 공포를 주고 있을 겁니다. 저는 그 군인들의 표정을 자세히 촬영하고 싶었습니다. 시민의 반대편에 선 죄책감이 가득한 그 표정을 말이죠.

 

저는 카메라 렌즈를 망원렌즈로 갈아 끼웠습니다. 그들의 얼굴을 찍으며 앞으로 점점 다가갔습니다. 촬영에 깊이 빠져 시간도 주변도 잠시 잊었습니다. 오직 카메라 뷰파인더에만 집중했습니다.

 

그때 뭔가 소리가 들렸습니다. 시위대가 구호 외치는 소리인 줄 알았습니다.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지만 뒤를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그때 누군가가 제 어깨를 확 잡아당겼습니다. 뒤로 넘어질 뻔해 화가 났습니다. 전에 만난 젊은이였습니다. 그는 어딘가를 가리켰습니다.

 

제가 첫 번째 경계선을 많이 지나와 있던 것입니다. 촬영에 몰두해 몰랐던 거죠. 좀 전에 제 뒤에서 들렸던 소리는 저를 향한 것이었습니다. 그때 상황을 지금 다시 생각하면 식은땀이 납니다. ‘혹시 그때 군인들이 나를 총으로 쐈다면…’

 

저는 첫 번째 경계선을 넘어 군인들 가까이에 와 있던 겁니다. 군인들은 저를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아마 발포 명령을 받았다면 당장 쏠 것 같은 표정이었습니다. 제 뒤에 있는 시위대가 앞으로 행진했다면 아마 제게 가장 먼저 발포했을 겁니다. 다행이었습니다.

 

끝나지 않은 우리의 봄 혁명


사실 이 글은 아직은 완성할 수 없는 글, 끝낼 수 없는 글입니다. 우리의 봄 혁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요. 기자들은 목숨 바쳐 취재하며 탄압받고 있습니다. 미얀마의 옛 수도 양곤주에 악명 높은 ‘인세인 감옥’1)이란 곳이 있습니다. 구금된 기자만 50명 이상입니다. 외신 기자도 있습니다. 최근엔 일본인 기자가 석방됐지만, 미국인 기자는 계속 감옥에 수감된 상태입니다. 다른 지역에 있는 기자들도 아무 이유 없이 체포돼 구타와 살해를 당하고 있습니다.

 

군부가 기자들을 국가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고 있다는 사실도 이해하기 힘듭니다. 기자가 기사를 쓰는 것이 국가의 명예를 실추하는 일인가요? 국가 원수의 명예롭지 않은 행동에 대해 기사를 쓰는 것이 나라의 명예를 훼손하는 일인지 궁금합니다.

 

군부는 미얀마의 주요 언론사 여섯 곳의 발행 중지를 명했습니다. 다른 언론사 사무실엔 군인과 경찰을 보내 물건을 훼손하고 찬탈했습니다. 해당 언론사의 기자들은 체포당해 고문 받고 있습니다. 글을 쓰고 있는 저 역시 국가 명예훼손으로 공개 수배 중입니다. 수배를 피해 피신하면서도, 저는 아직 취재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군부는 인터넷에서 뉴스를 보지 못하게 막고 있고,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등 SNS를 통해서도 소식을 전하지 못하게 탄압하고 있습니다. 대다수 기자는 군부의 기자회견을 보이콧했습니다. 이에 군부는 부하들을 기자로 위장해 기자회견에 참석시키기도 했습니다. 군부는 군부 방송인 먀와디(MWD)와 국영방송 MRTV를 장악하고, 가짜뉴스도 내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국민들은 그 방송을 전혀 믿지 않습니다. 미얀마 국민들 사이에선 군부가 장악한 방송국에 대한 조롱이 신조어처럼 쓰이고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면, “너 먀와디와 MRTV 같아”라고 말하는 식입니다.

 

무력으로 국가 권력을 빼앗은 군부의 통치 아래, 미얀마 언론의 자유는 쇠사슬에 매였습니다.

 

 

필자: 뚠네이소(가명)

영화감독, 소설가, 기자이며 민주화운동가입니다. 2월 1일 쿠데타 발생일부터 젊은 활동가들을 조직했습니다. 시위 현장을 생방송으로 송출하며 동참했습니다. 현재 수배령이 내려졌으며 물밑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항의 상징인 ‘세 손가락 경례’로 군부에 체포된 유명 모델 파잉 타콘은 그가 매우 아끼는 제자입니다.

 

역자: 쿳다우(가명)

미얀마 군사독재 정권에 맞서 투쟁하고 있는 한국 거주 정치적 망명인입니다. 미얀마 내 파업 노동자에게 거액의 후원금을 송금해 군부에 공개 수배를 받았습니다.

 

 

 

1) ‘미얀마의 가장 어두운 지옥’으로 불리는 원형 감옥이다. 교도관들의 부패, 잔혹한 고문, 수감자들 사이의 학대 등으로 악명을 떨쳤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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