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일2022-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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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가 넓어지는 만큼 기사도 넓어진다

  • 저자 : 이명재
  • 발행일 : 2022-11-02

‘강조했다’, ‘밝혔다’, ‘발표했다’, ‘주장했다’, ‘말을 아끼다’, ‘선을 그었다’, ‘분명히 했다’, ‘설명했다’, ‘논란이 된다’.

 

한국 언론의 기사에서 자주 보게 되는 서술어들이다. 그런데 이런 말들은 과연 기사의 의도에 맞게 적절하게 쓰이는 것일까. 어떤 이의 말을 전하면서 이를 ‘말했다’라고 하는 것과 ‘밝혔다’라고 하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이며, ‘말을 아끼다’와 ‘침묵했다’에는 또 어떤 차이가 있을까.

 

대체로 정부 부처나 권위 있는 기관에서 발표하는 내용에 대해 기자들은 흔히 ‘밝혔다’라고 쓴다. 그러나 경찰 포승에 묶인 범인이 기자들에게 하는 말을 ‘밝혔다’라고 하지는 않는다. 여기서 둘 사이의 차이가 드러난다. ‘말하다’에 비해 ‘밝히다’라는 표현에는 그 내용에 대한 권위와 정당성이 더 높게 부여된 셈이다. 그러나 여기서 질문을 던져보자. 정부의 발표라고 해서 그 내용이 어떤 것이든 권위와 정당성을

부여해 주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설명했다’는 서술어도 마찬가지다. 이 말의 뜻은 ‘얘기해서 밝히다’라는 말이다. 그러나 얘기를 하는 것과 그 얘기로 밝게 해 주는 것은 다른 것이다. 얘기하더라도 명료하게 풀리는 것이 아닐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확한 표현은 ‘설명하려 했다’고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미국의 경우 워싱턴포스트와 뉴욕타임스의 기사에서 발언자의 말을 인용할 때 거의 대부분은 ‘say’, ‘said’, ‘told’로만 돼 있다. 한국 신문의 기사들처럼 ‘경고하다’, ‘강조하다’, ‘밝히다’, ‘설명하다’ 등의 다양한 표현을 쓰지 않는 것이다. ‘said’와 ‘told’가 반복되는 것이 표현을 단조롭게 한다고 해서 이를 다른 표현으로 바꾸지 않는 이유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말을 아낀 것과 대답하지 못한 것

 

물의를 일으킨 인물에게 질문을 던진 기자가 그로부터 아무 말을 듣지 못했다. 상대방은 침묵으로 일관할 뿐 한마디 말도 없었다. 그렇다면 그가 ‘말을 아낀’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실은 상대방은 아낄 말이 없는 것이다. 할 말이 없거나 궁색하기 때문에 할 말을 못 찾은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답변을 하지 못했다’로 써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적잖은 기사들은 “말을 아꼈다”고 씀으로써 침묵의 당사자에 대해 기자 자신도 의도하지 않았던 정당화 효과를 부여해 주고 만다.

 

‘카카오 먹통’ 사태로 지난 10월 21일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종합감사에 증인으로 출석한 류긍선 카카오모빌리티 대표의 답변을 전하는 어느 기사를 보자.

 

한편 이날 심상정 정의당 의원은 ‘앞서 발표한 피해보상 금액 7,550원은 3만 9,000원의 구독료를 일할해서 6일치를 줬다고 하던데, 그것은 멤버십 이용료에 대한 환불이지 먹통사태로 인한 영업손실 피해보상은 아니지 않느냐’며 피해보상금액 관련 지적에 나섰다.

 

이에 류 대표는 “그 부분은 따로 공급자들과 논의를 통해 피해수집 및 보상책을 마련하겠다”고 답했지만 구체적인 보상 금액 및 대책을 묻는 질문에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는 답변만 반복했다. (중략) 이에 심 의원은 ‘먹통시간 동안 일체 영업을 못 했고 카카오에서 영업손실을 다 파악하고 있는데 이것도 기사들이 일일이 신고를 해야 하냐, 카카오가 능동적으로 피해보상을 하겠다는 대책 갖고 나오셨어야 하지 않냐’고 강하게 질책하자 (류 대표는) “그 부분은 부제 등 다양한 이슈가 있다”며 말을 아꼈다. 

 

내내 궁색한 답변만 내놓은 류 대표의 말에 대해 “말을 아꼈다”고 함으로써 마땅한 답을 찾지 못하고있는 상황의 곤경을 덜어준 셈이 돼버렸다. 기자가 전하려고 의도한 바가 본래 그것이었던 것 같지는 않다. 어휘 사용의 미숙에서 벌어진 일이다.

 

이들 말을 이렇게 바꾸어 보면 어떤가. 가령 “말을 아꼈다”를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나 “구체적인 답을 하지 못 했다(안 했다)”로 바꾼다면 기사의 논지는 적잖게 달라진다. 서술어 하나가 작다면 작은 차이지만, 그 작은 차이들이 모여서 큰 차이를 만들어내는 변화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적확’ 추구해야 의도한 표현 가능해

 

어떤 사안을 비판할 때 조사 하나가 그 비판의 강도와 수위를 확 떨어뜨려 버리기도 한다. 맹렬하게 규탄과 성토를 하는 기사 중에 “비판을 받고 있다”고 표현해야 할 대목에서 “비판도 나온다”고 한다면 자신이 꺼내든 비판의 칼에 스스로 솜 덮개를 씌우는 격이 되고 만다. 어떤 문제에 대해 매섭게 비판할 의도로 쓴 기사에서 “꼬집었다”고 함으로써 때려야 할 때 살을 꼬집는 정도의 표현을 쓰는 것을 보게 되면 읽는 독자는 맥이 빠져버린다. 이렇듯 사소한 조사 하나, 적절한 어휘의 사용이냐 아니냐가 작지 않은 차이로 이어지는 것이다.

 

기사를 쓴다는 것은 곧 프레임을 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사에는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간에 프레임, 즉 논지의 틀이 형성되게 돼 있다. 프레임에는 큰 프레임과 작은 프레임이 있다. 기사 전체의 의도된 논지를 큰 프레임이라고 한다면 큰 프레임은 작은 프레임들의 누적과 종합으로 이뤄진다. 기자의 일이란 큰 프레임에는 큰 프레임대로, 작은 프레임에는 작은 프레임대로 거시적이면서도 세밀한 눈으로 프레임을 제대로 제시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작은 프레임이 큰 프레임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그 기사는 ‘정합성’을 잃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앞뒤가 부합하지 않는, 논지에서 벗어난 전개로 기자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큰 프레임이 작은 프레임으로 나타날 때는 개념어나 서술어 등에서 적확하지 않은 어휘를 써서 나타나는 결과인 경우가 많다.

 

기사든 문학 작품이든 글을 쓰면서 표현하고자 하는 말에 들어맞는 말을 정확히 찾아 쓴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정확을 넘어서 ‘적확(的確)’을 추구할 때 그 표현은 더욱 자신이 의도한 대로 될 수 있다. 적확을 넘어서서 어떤 사물이든 그것을 표현하는 데는 오로지 단 하나의 단어밖에 없다는, 프랑스 소설가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유명한 ‘일물일어(一物一語)’의 원칙도 있다. 그러나 이는 완벽한 작가, 아니 설령 그런 작가라도 모든 경우에 그럴 수는 없는 신의 영역에 속하는 일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자기가 표현하려고 하는 생각, 개념과 가장 가까운 말을 쓰려고 애쓰는 것이다.


‘논란이 되고 있다’는 표현에 묻힌 

사안의 진위와 시비를 따지는 태도

 

신문이나 방송 기사에서 흔히 쓰이는 말 중 하나가 ‘논란’이다. 찬성과 반대가 엇갈리고 논쟁이 되는 사안일 때 쓰이는 표현이다. 그러나 찬반의 논쟁으로 삼아서는 안 되는 상황일 때도 이 표현이 쓰이는 경우가 많다. ‘논란’의 남발은 언론이 사회적 문제와 사안을 좀 더 깊게 분석하고 파고들어야 할 때 이를 회피하고 마는 결과를 초래한다. 사안에 대한 진단을 회피하는 것을 넘어서서 왜곡하기도 한다.

 

논란으로 봐서는 안 될 사안들이 논란이 된 사례 중 하나가 몇 달 전 장애인단체의 장애인 권리 예산 등을 요구하는 시위에 대한 언론의 보도였다. 언론은 당시 야당 대표의 발언을 인용하며 양측 간 ‘논란’으로 몰아갔다. 주요 정당 대표의 비인권적이며 성숙하지 못한 태도에 대해 단지 ‘논란’으로 ‘중계’해 줌으로써 논란이 돼서는 안 될 일을 논란으로 만들어 준 것이다. 장애인 이동권 시위에 대한 논란은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우리 언론 보도의 한 단면을 보여줬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출근길 지하철 시위를 지지하는 글을 트위터에 올린 이유에 대해 질문 받은 안산 양궁 국가대표 선수가 “경기력 외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겠다”고 답변하자 이를 ‘전장연 논란’으로 만들었고, 게다가 과거 언론에 의해 가공된 ‘페미니즘 논란’까지 끄집어냈다.

 

‘논란’이라는 표현이 자주 쓰이는 것은 취재원의 말을 그대로 인용해 따옴표로 보도하는 경우다. 그러나 이는 ‘받아쓰기 저널리즘’, ‘형식적 사실주의’라는 비판을 사는 이유가 되고 있다. 따옴표 속에 넣어 전달한 내용의 정확성, 그걸 넘어 사안 자체의 사실 여부를 검증하는 노력 없이 단순히 인용 보도하고는 이를 손쉽게 ‘논란’으로 규정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논란이 돼야 할 사안에서 논란 자체가 오히려 실종되고, 논란이 될 수 없는 것을 논란으로 만드는 언론의 행태들. 그것은 언론에 의한 언어의 오염이며 타락이다. 그릇된 언어는 그릇된 인식에서 나오고, 그릇된 언어가 다시 그릇된 인식을 부른다. 한국의 언론이 언어 왜곡의 한 발원지이자 오염원의 배양처가 되는 현실의 단면들이다.

 

언론의 언어 오염과 타락은 한국 언론의 객관주의와도 많이 닿아 있다. 한국 저널리즘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로 받아들여져 온 ‘객관성’은 그 자체로는 잘못될 게 없다. 문제는 선택적 객관성, 부실한 객관성에 있다. 객관성을 ‘철저한 팩트 기반에 입각한 보도’라고 정의한다면 한국 언론은 객관적인지 정확히 따져야 할 때는 팩트를 따지지 않고, 최소한 의 보편 타당성에 대한 검증을 거쳐야 할 때 역시 객관성의 이름으로 팩트 확인의 노력 없이 단순 중계에 머무른다. 그럴 때 흔히 사용되는 상투어 중 하나가 ‘논란이 되고 있다’는 표현이다. 논란 속으로 들어가 그 사안의 진위와 시비를 따져보는 태도에서 소극적인 측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언론 언어의 확장이 사회의 확장

 

잘못된 서술어, 용어의 사용은 한국 언론의 어휘 수준이 전반적으로 낮아지고 있는 것에서도 비롯된다. 이는 특히 개념어, 한자어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서도 나오고 있다. 지난 9월 16일 자 한겨레를 보자.

 

올해 초 중소기업에 입사한 김아무개(28) 씨는 사내 메일을 주고받다가 익숙하지 않은 단어들을 보고 수차례 검색을 했다. ‘금일’이 오늘을 가리킨다는 것까진 알고 있었지만, ‘작일’이나 ‘명일’은 김 씨가 처음 보는 표현이었다. 김 씨는 “일상적으로 ‘어제’와 ‘내일’이라고 쓰는 표현을 왜 꼭 회사 안에서만 이렇게 써야 하는지 이해가 안 가지만, 신입이니까 상사들이 쓰는 말을 따라서 쓰고 있다”고 했다.

 

이 기사는 그즈음에 있었던 ‘심심한 사과’ 소동과 관련된 내용으로, 젊은 층이 낯설어하는 이러한 표현들을 ‘회사어’로 명명하고, 신입사원들이 익혀야 할 상식으로 ‘회사어 사전’이라는 글이 공유되기도 한다고 소개했다. 심심한 사과 소동이란 한 웹툰 작가의 사인회에 차질이 생기자 주최 측인 카페가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라는 공지문을 게재한 것에 대해 네티즌들이 ‘하나도 안 심심한데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면서 해당 카페를 성토한 것을 말한다. ‘깊고 간절함’을 뜻하는 ‘심심(甚深)’을 ‘지루하고 재미없다’로 오해한 것이다.

 

생경한 표현, 지나친 한자어 표현이나 고루하고 낡은 표현들은 분명 개선돼야 한다. 위의 기사에서 얘기하듯 ‘우리 팀’ 대신 ‘폐팀’, ‘내일’ 대신 ‘익일’이나 ‘명일’, ‘어제’ 대신 ‘작일’이라는 말, ‘붙임’ 대신 ‘유첨’이라고 쓰는 것은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일상생활에서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은 한자어의 사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확대해서 한자어는 모두 낡고 고루한 용어이니 추방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는 데로까지 나아간다면 언론의 언어, 아니 우리 사회의 언어를 협소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실 한자어 자체가 우리 국어의 일부다. 어떤 언어든 간에 전적으로 고유한 언어는 있을 수 없다. 게다가 한자는 단지 중국의 문자가 아니라 동아시아 공동의 문자이며, 한국어의 확장과 발전에서 한자어를 빼놓고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다. 순 한글 표기를 하는 한겨레의 기사를 보더라도 한자 표기는 안 하지만 기사에 쓰이는 어휘의 대부분이 한자어인 것에서 이를 알 수 있다.

 

‘내가 아는 어휘의 크기가 곧 나의 세계의 크기다’라는 말이 있다. 글과 말을 수단으로 일을 하는 기자, 언론에 더욱 해당되는 말이다. 특히 개념적 어휘가 중요하다. 기자의 일은 상당 부분 개념화, 추상화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같은 개념화, 추상화를 하는 데 한자어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는 필수적이다. 올해 초 ‘무운을 빈다’는 말이 일으킨 해프닝은 단지 해프닝으로 넘길 수 없는 일이었다. ‘무인으로서의 운’을 뜻하는 이때의 무운(武運)을 ‘운 없기를 바란다’는 무운(無運)으로 터무니없이 해석한 방송기자의 경우는 그저 웃어 넘길 수 없는 우리 언론의 한 현상이었다. 언어가 협애해지고 단순해지며 부적확한 정도가 아닌 의도와 상반된 어휘가 사용되는 기사들이 흔히 발견된다. 대중의 언어생활을 반영하는 것이자 선도하는 일의 한 일익을 맡은 기자들의 어휘가 빈곤하다면 그 언론의 언어가 빈곤해지고 이는 그 사회의 언어의 빈곤으로 이어진다. 나아가 사회와 그 사회의 문제에 대한 언론의 이해의 증진을 가로막는다. 언론 언어의 확장이 곧 언론의 확장이며 그 사회의 확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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