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일2023-04-03
지연된 정의가 정의 구현의 불발보다 낫다는 믿음으로

지연된 정의가 정의 구현의 불발보다 낫다는 믿음으로

  • 저자 : 신심범
  • 발행일 : 2023-04-03

형제복지원에 가려 알려지지 않았던 부산의 부랑인 집단수용시설 영화숙·재생원. 국제신문은 1960~70년대 이곳 수용자들의 피해 실태를 단독 보도해 제54회 한국기자상을 수상했다. 행색이 남루하다는 이유로 착취당하고 기록조차 찾기 어려워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던 피해자들을 만나본다. 편집자 주

 

2022년 10월 26일. 경남 양산시 물금읍 한 카페에서 처음 손석주(60) 씨를 만났다. 손 씨는 이곳 근처 중국집에서 배달부로 일한다. 만남 이틀 전, 그는 양산시청 기자실을 찾아갔었다. 선감학원 진상규명이 이뤄졌다는 기사를 접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어느 기자든 일단 만나서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다는 생각에 휴가를 내고 그곳으로 향했다고 한다. ‘왜 세상은 선감학원과 형제복지원 이외의 수용 피해자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가. 왜 내가 시설에서 당한 피해는 신문에 한 줄도 보도되지 않는가’라고 손 씨는 따져 묻고 싶어 했다. 호소하고 싶어 했다. 자신이 당한 피해, 그 실체적 사실을 ‘분명히 있었던 일’로 인정받고 싶다고 했다. 세상이 이를 몰라서는 안 된다고 했다.


탈출 후 다시 끌려간 수용소

 

손석주 씨는 ‘영화숙·재생원’의 피해 생존자다. 1960년대 부산 사하구(당시 서구) 장림동에 들어섰던 집단수용시설인 이곳은 당대 부산의 유일한 공식 부랑아 시설로, 훗날 형제복지원으로 이어지는 부산 지역 복지시설 내 인권유린의 기원이다. 지금이야 이런 설명을 줄줄 늘어놓을 수 있지만, 손 씨를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그곳이 어떤 곳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런 시설이 있었다는 정도만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다. 그마저도 어떤 기록을 보고 알게 된 건 아니었다. 사하구 출신인 어머니가 전해준 이야기를 계기로 우연히 시설 이름을 들어봤을 뿐이었다.

 

2018년 4월로 기억한다. 갓 기자가 돼 새벽마다 경찰서로 출근했지만 ‘땟거리’를 못 찾아 애를 먹던 무렵이다. 사하구 신평동 출신인 어머니는 어릴 적 살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영화소’라는 부랑아 시설이 있었다고 했다. 시설 명의 끝 자로는 숙(塾)보다 소(所)가 어울리니, 이름을 잘못 기억하고 있었던 것 같다. 어머니는 그곳에 강제로 끌려온 어린이들이 많았고, 얼굴이나 팔에 멍 자국이 많아 구타가 잦았을 거라고 했다. 당시엔 어머니의 제보가 못마땅했다.

 

“50년 전 일을 말만 가지고 어떻게 취재하란 말이고?”

 

4년하고 조금 더 지난 뒤 듣게 된 손 씨의 증언은 어머니의 설명과 흡사했다. 양산이 고향인 그는 11살 무렵이던 1973년 돈벌이를 위해 부산으로 가출했다. 중구 일대에서 신문을 판 게 첫 일이었다. 당시 어린 신문팔이에게는 숙식이 제공됐다. 여러모로 부모 없이 거리를 배회하며 걸식하는 사전적 의미의 ‘부랑아’와는 처지가 달랐다. 그런데도 손 씨는 재생원으로 끌려갔다. 부산데파트 앞에서 일하다 ‘돈벌이를 소개해 주겠다’며 밥 한 그릇을 사준 낯선 아저씨에게 속은 것이다. 옛 부산항연안여객터미널 근처에 있던 재생원 사무실에 들러 간단한 입소 절차를 밟은 그는 머지않아 수용소에 들어갔다.

 

수용소 각 방은 ‘소대’ 단위로 분류됐다. 방에는 열 살 아이부터 쉰 살이 넘은 성인까지 마구잡이로 수용됐다. 한 소대에만 30~50명이 밀집해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만 했다. 수용자 관리는 형제복지원과 마찬가지로 군대식이었다. 원생 중에서 중간관리자를 뽑았는데, ‘완장’을 찬 그들은 자신들도 피해자면서 별 이유 없이 폭력을 쓰거나 수용자를 괴롭혔다. 식사는 하루 두 끼였다. 강냉이죽이나 보리밥 정도가 다였다. 부실한 끼니에 반복되는 가혹 행위를 이기지 못해 쓰러지는 원생도 적지 않았다. 손 씨는 “아이가 가마니에 덮인 채 수레에 실려 야산으로 옮겨지는 모습을 네다섯 번 봤다. 죽은 아이를 산에 묻으러 가는 것도 봤다”고 했다.

 

그는 4개월 만에 재생원을 탈출했다. 아들의 수용 사실을 전혀 통보받지 못했던 아버지는 죽은 줄 알았던 자식의 귀가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다니던 국민학교는 ‘출석일 미달’을 이유로 손 씨를 퇴학시킨 상태였다. 손 씨는 돈을 벌기 위해 구두닦이 생활을 시작했다. 함께 구두를 닦는 형들의 괴롭힘에 벌이마저 시원찮아 배를 곯던 그는 부산진역 앞에서 한 아저씨를 만났다. 그 남자는 ‘배고프겠구나. 자장면이라도 사 먹으라’며 20원을 줬다. 손 씨가 배를 채우고 다시 그 남자에게 가자 음료수 한 잔을 건넸다.

 

음료수를 마시자 갑자기 잠이 밀려왔다. 눈을 떠보니 또다시 재생원이었다. 한 차례 탈출한 사실이 들통날 것을 걱정한 손 씨는 ‘손기석’이란 가명을 만들어 생활했다. 손 씨는 또다시 10개월을 갇혀 지냈다.


보도 후 나타난 또 다른 피해자

 

손 씨의 증언은, 물론 충격적이었다. 그의 말마따나 ‘세상이 몰라서는 안 되는 일’임이 분명했다. 문제는 기록이었다. 백 마디 증언이 있더라도 피해 사실을 입증할 기록이 없다면 말의 무게는 한없이 가벼울 수밖에 없다. 중세 유럽에선 백 글자 글보다 (신 앞에서 맹세할 것을 전제로 한) 말 한마디가 더 신뢰할 만한 것으로 여겨졌다지만, 2022년에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마 “50년 전 일을 말만 가지고 어떻게 취재하겠느냐”고 따져 묻지 못했다. 손자뻘 되는 기자 앞에서 눈물을 흘리 “있었던 일이 분명히 있었던 일로 인정받게 해달라”고 호소하는 그를 도저히 외면할 수 없었다.

 

50년 전 있었던 일들의 기록을 어디서 찾아야 할지 막막했다. 형제복지원 진상규명의 일선에 서 있었던 박민성 부산시의원(전 부산사회복지연대 사무국장)에게 전화해 방법이 있을지 물었다.

 

“일단 기사를 먼저 쓰시고 제보를 받아보시죠. 형제복지원 같은 경우에도 당시 재단에서 임원을 맡았던 사람들의 제보로 그 사람들이 보관 중이던 자료를 전달받은 덕에 진상규명이 가능했었다 아닙니까.” 

 

그의 말대로 일단 기사를 쓰고자 해도 최소한 그 시설이 언제 어떻게 운영됐고, 누가 운영했는지 정도는 알아야 했다.

 

김일환 박사가 아니었다면 첫 기사는 영영 쓰지 못했을지 모른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의 소개로, 김 박사가 2021년 발표한 논문 <지역에서의 ‘부랑인’ 수용과 민간 사회복지>를 접하게 됐다. 1960~1970년대 부산 지역 내 민간복지시설 실태를 정리한 글이다. 김 박사는 2020년 부산시 형제복지원 진상규명 조사 때 발견된 영화숙·재생원 관련 문건이나 오래전 신문 기사들을 총망라해 이 곳의 대체적 성격을 확인했다. “좋은 일 하시는 거니 좀 더 발품을 파는 노력을 해 달라”는 김 박사의 격려도 힘이 됐다.

 

여러 곡절 끝에 손 씨의 증언을 기사로 만들었다. 다음 기사를 어떻게 쓸지는 전혀 준비되지 않았다. 손 씨 외엔 피해 증언자도, 기록도 없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보도 당일 회사로 전화가 걸려왔다. 유옥수 씨였다. 신문을 보고 깜짝 놀라 당장 수화기를 들었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영화숙의 생존 피해자라고 했다. “나와 똑같은 일을 당한 동생(손 씨)에게 꼭 밥을 한 끼 사주고 싶으니 만나게 해달라”고 청했다. 마음이 급했다. “일단 만납시다. 선생님이 기억하는 그곳의 위치 등을 여쭙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며칠 뒤 유 씨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실제 시설이 있었던 장소를 안내해줬다. 이곳이 과거 늪을 쓰레기로 매립한 땅이었다는 사실, 영양실조·질병·구타 등으로 원생이 숨지면 야산이나 늪에 아이를 묻어야 했던 과거도 함께 털어놨다. 가끔 이곳 야산에 올라 자신이 묻어준 형·동생을 위해 막걸리를 뿌려주고 온다고도 했다.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거라 생각해 가족에게조차 말하지 않았는데, 신문에 자신이 본 피해가 소개돼 기쁘면서도 서글프다고 했다. 향후 만나게 된 생존 피해자 대부분은 유 씨와 마찬가지로 “보도를 보고 놀라 전화했다”고 자신의 연락 계기를 설명했다. 이후 이들은 유 씨의 집에서 정말로 ‘밥 한 끼’를 함께 했다. 이들의 밥 모임은 현재 ‘부산 영화숙·재생원피해생존자협의회’로 거듭났다. 막내인 손 씨가 회장을 맡고 있다.


 

 


이제서야 시작된 진상규명

 

피해 생존자들이 증언한 영화숙·재생원은 형제복지원에서의 참상과 너무나 닮아있었다. 아니, 형제복지원이 영화숙과 재생원을 반복했다고 표현하는 게 맞았다. 영화숙·재생원은 형제복지원이 부산시 공식 부랑인 시설로 지정(1975년)되기 이전인 1968년 공식 시설로 기능했다. ‘부랑인 소탕령’으로 불리는 ‘내무부 훈령 제410호’가 만들어진 1975년 이전부터 일찌감치 강제수용이 자행됐다. 수용 공간을 소대·중대 등으로 구분하고, 원생이 원생을 폭력으로 다스리는 관리 방식은 형제복지원과 완전히 같다. 굶어서, 앓아서, 맞아서 죽는 아이가 부지기수였고, 그들의 주검은 야산 등에 버려졌다. 원장은 부산시의 보조금과 외부 단체의 후원금 등을 착복해 자산을 쌓았다. 원장이 형성한 자산은 2세에게 전수됐다. 영화숙·재생원 생존 피해자 중 다수는 후일 형제복지원에 재차 수용됐는데, 그중에는 영화숙에서의 ‘경험’을 살려 형제복지원 소대장으로 활동한 이도 있었다(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은 그를 ‘종일이 형’이라 불렀다. 현재는 고인이다).

 

결국 ‘군대식 통제’로 대표되는 부산 민간사회복지의 특유함은 영화숙·재생원에서 비롯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부산 집단수용시설 인권유린이 처음 발생한 곳이 바로 영화숙·재생원이었다. 부산시가 과거의 잘못을 반성한다면, 그 첫 대상자는 바로 이곳 피해자들이어야 했다. 문제는 또다시 기록이었다. 여러 증언이 모였지만, 이것만으로는 진상에 도달할 수 없었다. 적어도 그 시설에 사람이 수용됐다는 문서 정도는 있어야 했다. 그래야만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또는 부산시 차원의 진상 조사가 진행될 수 있었다. 형제복지원 진상규명 사례를 참고해 이순영 영화숙 원장 일가와도 접촉을 시도했지만 아무도 기자와 만나려 하지 않았다.

 

나조차도 반신반의했다. 지금도 기록이 남아 있을까. 증언에 부합하는 기록을 찾을 수 있을까. 괜히 시간만 버리는 건 아닐까. 피해자들에게 헛바람만 잔뜩 불어놓고는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게 되지 않을까. 뭐가 어찌 됐든, 일단은 시도해봐야 했다. 가장 먼저 문을 두드린 곳은 국가기록원 부산기록관이다. 생산된 지 오래된 행정 문서가 집결되는 만큼, 영화숙과 재생원 관련 문서 또한 보관됐을 가능성이 높았다.

 

운 좋게도 이곳에서 영화숙 폐쇄 직전 재단이 부산시에 양곡 반환과 관련해 주고받은 공문이 발견됐다. 이 공문에는 당시 영화숙에 수용 중이던 ‘최후의 아동’ 19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어디엔가 영화숙과 재생원에 수용된 아동의 이름이 기재된 문서가 잠들어 있을 거라고 기대할 만했다. ‘개인 기록은 아무리 시일이 지나도 타인에게 제공하지 않는 것이 관례’란 이유로 비공개 결정이 난 이순영 영화숙 원장의 재판기록도 이의신청을 통해 확보할 수 있었다. 국가기록원이 국제신문의 설득을 받아들여 전향적 판단을 해주지 않았다면 요원했을 일이다. 국가기록원에서 발견된 문헌은 적어도 진상규명 작업이 헛수고는 아니라는 점을 입증했다. 판이 깔린 것이다.

 

이후 진상규명 작업이 조금씩 진행 중이다. 2023년 3월 9일 부산시의회는 ‘부산시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자 명예 회복 및 지원에 관한 조례’를 개정했다. 조례를 고쳐 영화숙·재생원 피해 생존자들이 형제복지원 사건과 동일한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근거를 마련했다. 조례 적용 대상에 ‘영화숙·재생원 등 부산시 소재 집단수용시설에서 국가 등의 부당한 공권력 행사에 의해 강제로 수용돼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된 사람, 신체적·정신적으로 피해를 본 사람’을 추가한 것이다. 조례는 진상규명을 위한 지원 근거를 명시했다. 부산시장은 △피해자 신고 접수 및 피해 실태조사 △관련 자료 발굴 △진상규명추진위원회 설치 △피해자 대상 상담 및 심리치료 △의료 및 생활 안정 지원 △명예회복 및 기억을 위한 추념 사업 등을 할 수 있도록 했다.

 

그저 행색이 남루하다는 이유만으로 인간 이하의 존재로 살아야 했던 그들은 지금도 수시로 내게 전화를 걸어온다.


“기자님, 앞으로도 우리의 이야기를 써주시고, 우리의 기록을 발굴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이제서야 진상규명의 첫 단추가 끼워진 셈이니, 마무리까지 계속 힘 좀 써달라는 말씀이다. 그럴 때마다 ‘50년 전 일이라 취재가 쉽지 않습니다’며 거꾸로 하소연하고픈 충동을 느낀다. 같은 이유로, 이 보도 덕에 여러 큰 상을 받게 돼 기쁜 마음이 든 것 못지않게 부담감이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지연된 정의가 정의 구현의 불발보다 낫다고 믿으며, 영화숙·재생원 피해 실태를 쫓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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