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는 세월호 참사 발생 10주년을 맞아 피해자와 가해자를 비롯한 관련 인물들의 지난 10년을 추적했다. 관련자 93명을 인터뷰하고, 수사·재판 자료와 세월호 조사위원회 기록물, 회고록 등을 분석했다. 내러티브 형식으로 기존 기사와 차별화를 시도해 잊어서는 안 될 참사를 재조명한 <산 자들의 10년> 취재기를 소개한다. 편집자 주
세월호. 세 글자는 대개 우리를 2014년 4월 16일로 데려갑니다. 배 한 척이 거짓말처럼 거대한 바다에 집어삼켜지던 그 장면을 떠올리며 각자 언제 어디서 그 소식을 접했는지 기억을 더듬곤 합니다. 참 긴 시간을 지나왔는데도 말입니다. 개개인의 삶은 물론 사회적으로도 재판과 조사, 입법, 집회 등 수많은 일들이 벌어졌지만, 세월호에 대한 우리의 정보는 업데이트가 멈췄던 겁니다.
시간이 흘러 관심도가 낮아지기도 하고 휘발성이 크고 정형화된 보도들이 독자의 마음을 파고들지 못한 탓도 있을 겁니다. 저 역시 불편한 마음에 슬며시 외면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여러 이유로 우린 지난 10년을 잘 모르지만, 그럼에도 참사 당일을 또렷이 기억하기에 ‘안다’고 착각합니다. 한국일보의 <산 자들의 10년>(총 4회, 번외편 등 포함 기사 10편·4월 12~25일)은 이런 현실에 대한 자성을 바탕으로 쓴 기획 기사입니다.

막막했던 첫 회의… “내러티브로 써보자”
지난 1월 말. 사회부 사건팀에서 저희 팀(엑설런스랩)으로 제안이 왔습니다.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함께 준비해 보자.’ 하루하루 마감이 바쁜 부서에서 오롯이 준비하긴 어려운 아이템을 협업을 통해 발전시켜 보자는 엑설런스랩 운영 취지에 맞는 주제였습니다. 그렇게 기획 구상에 들어갔습니다.
첫 회의는 참 막막했습니다. 세월호 관련 재판과 참사의 원인 조사 결과 등을 정리하거나 선박을 포함해 각종 시설의 안전 진단을 해보자는 건 필요한 보도지만 기시감이 컸습니다. 유족이나 가해자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여론조사를 하자는 기획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지난 10년간 나왔던 기사들의 반복처럼 느껴졌습니다. ‘세월호’란 단어만 들어가도 읽지 않는 독자들의 피로감을 감안하면 백과사전식 보도로는 선택을 받을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때 사회부장과 유대근 선배(세월호 참사 10주기 특별기획팀장)가 비슷한 의견을 냈습니다. 바로 내러티브 기사였습니다. 참고해 보자고 제시한 기사도 동일했습니다. 퓰리처상 수상작(2022)인 애틀랜틱(The Atlantic)의 <What Bobby McIlvaine Left Behind(바비 맥일베인이 남긴 것들)>입니다. 9·11테러 사망자 유품인 일기장을 둘러싼 그 부모님과 약혼자의 갈등을 소재로, 추리소설처럼 쓴 기사입니다. 20년이란 세월을 보낸 남은 자들의 감정과 심리를 세밀하게 그려냄으로써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수작이었습니다. 공감을 얻어 테러의 참혹함을 잊지 않게 해준 셈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을까.’ 고백하건대 저의 첫 심정은 그랬습니다. 내러티브 기사는 영미권 재난 보도에서는 흔했지만 저희 팀원들에게는 낯선 형식이었습니다. 누구도 제대로 써본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독자의 몰입도를 최대로 끌어올릴 수 있는 형태라는 건 모두 동의했습니다. 참사가 ‘내 일일 수 있다’고 공감해야만, 그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다소 어렵고 복잡했던 그 10년을 다시 읽어보려는 노력은 ‘내 일’일 때만 가능한 것이니까요. 우리는 ‘물꼬를 터주는 기사를 써보자’고 마음먹었습니다.
자연스레 다음 과제에 부딪혔습니다. 바로 주인공을 누구로 삼을 것인가입니다. 생존자, 유족, 세월호 선원과 선사(청해진해운) 임직원들, 해양경찰, 해양수산부와 청와대 인사, 그리고 10년간 참사 조사에 참여한 전문가와 활동가까지. 세월호 참사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빼놓아서는 안 되는 증인들입니다. 그런 까닭에 취재팀은 약 2개월간 서울, 부산, 인천, 강원, 광주, 경기, 경북, 전남, 제주, 충남 지역 20개 도시의 총 93명을 인터뷰했습니다. 그러면서 서사를 이끌 주요 인물에 대한 저희만의 기준을 세웠습니다. 긴 세월 속 부침을 보여줄 다면적 인물일 것. 그간 행적이 비교적 알려지지 않은 인물일 것. 그렇게 3회 분량의 내러티브 기사의 큰 두 축은 가해자와 유족으로 좁혀졌습니다.

주소 하나 들고 찾은, 1회 주인공
가해자 그룹 취재는 사실 반신반의했습니다. 찾을 수 있을까도 의문이었고 만난다고 한들 문전박대만 당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됐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의 이야기는 참사 이후를 설명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조각이었습니다. 작은 실마리라도 잡히는 대로 움직였습니다. 예컨대 형기를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간 선원과 선사 직원들을 판결문 속 주소 하나만 손에 쥐고 무작정 찾아 나섰습니다. 시리즈 기사의 문을 연 전영준은, 그렇게 찾은 인물입니다.
지난 3월 8일, 전유진 기자는 판결문에 나온 전영준의 주소지 하나만 들고 부산으로 갔습니다. 그는 승객 구조 책임을 방기한 혐의로 1년 6개월간 옥살이를 하고 2016년 출소한 세월호 기관부 선원입니다. 낡은 아파트 앞에서 종일 기다린 끝에 저녁에 귀가하던 전영준의 아내를 만났습니다. 의외로 아내는 기자를 집으로 들였습니다. 무려 3시간여 동안 들은 전영준의 삶은 기구했습니다. 임시 채용돼 배를 탄 첫날 사고가 났고 수감 생활 중 딸의 사망 소식을 들었으며 출소 후에는 생활고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전영준을 만나진 못했습니다. 2021년 급성 췌장암으로 숨진 후였으니까요. 하지만 아내와 처형 부부, 또 그가 옥중에서 쓴 반성의 편지를 받았던 장헌권 목사 등의 입을 통해 그가 생전에 자신의 죄를 절감하고 괴로워했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그즈음 김석균 전 해경청장과의 만남도 성사됐습니다. 참사 이후 언론과는 첫 단독 인터뷰였습니다. 세월호 참사를 돌아보는 책 출간을 계기로 약속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의 10년은 전영준과는 아주 달랐습니다. 무엇보다 김석균은 옥살이를 하지 않았습니다. 304명이 숨진 세월호 구조·수색 작업의 총책임자이나 무죄 판결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공직에서는 물러났지만 충남의 한 대학에서 번듯하게 일하고 있었습니다. 외형의 차이만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당시 인터뷰를 맡았던 유대근 선배는 “그때(참사 당시)로 돌아간다고 해도 상황이 달라지기는 어렵다”는 답변을 들었으니까요. 죄책감의 크기도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두 인물의 인터뷰 이후 기사 개요에도 틀이 잡혀갔습니다. 피해자 입장에서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인물인 것은 맞지만 간극이 큰 두 남자. 그들을 비교해 보여주는 것만으로 많은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취재팀의 생각을 직설적으로 담는 글은 피하고 싶었던 차에 좋은 대안을 찾은 겁니다. 보여주기만으로도 우리가 탄식했던 지점과 고민을 독자와 충분히 나눌 수 있으리라 기대했습니다. 그런 의도는 2, 3면에 대비되는 두 인물을 배치하는 지면 편집으로도 이어졌습니다.
입체적으로 보여준 감정의 과정
‘또 세월호 이야기냐.’ 참사 피해자의 목소리를 담은 기사에는 여지없이 달리는 댓글입니다. 참담한 반응이지만 무시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취재팀은 궁금했습니다. 왜 그렇게 말할까. 나름대로 찾은 여러 이유 중 하나는 우리 자신에게 있었습니다. 참사 기사 속 정형화된 피해자의 이미지가 반감을 일으키는 데도 일조하고 있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슬퍼하거나 분노하는 단편적인 모습을 재생산하지 말자는 데 의견을 모으게 됐습니다. 그 긴 시간 단 하나의 감정이나 생각으로 살아왔을 리가 없을 겁니다. 아파서 좌절하다가 분노하고 단념하기도 하며 한 발 나아가는 그 흔들림의 과정을 입체적으로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그래야 독자의 공감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 서사에 잘 맞는 유족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간 많이 알려지지 않은 분들이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원다라 기자는 지난 2월 어느 날 무작정 제주도로 떠났습니다. 유족들의 참사 10주기 행진 행사의 출발지였습니다. 제주, 진도, 안동, 구미, 정읍, 군산, 인천 등을 행진할 때 찾아가 유족들을 만났고 5~10㎞씩 함께 걸으며 기사 취지를 설명했습니다. 이미 수많은 언론에 데이고 치인 분들에게 섣불리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저와 원 기자는 차근히 기다리고 조심히 다가서면서 고 강승묵 군과 김제훈 군, 이경주 양의 부모님들을 발견했습니다. 처음엔 주저했지만 ‘우리의 이야기로 우리 같은 참사 피해자가 더는 없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용기를 내주셨습니다.
3회 서사를 이끈 장훈(고 장준형 군 아버지) 씨는 또 다른 유형이었습니다. 그는 유족 모임의 장을 맡기도 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적극적으로 참사 조사에 관여했습니다. 언론에 자주 등장했던 분이기도 합니다. 애초 저희가 생각한 기준과 딱 들어맞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10년의 시간 적지 않은 예산이 투입됐는데도 침몰 원인조차 합의하지 못한 이유, 유족들이 아직도 진상 규명을 외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복합적이고 다면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분이라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유족 모임의 대표자가 아니라 ‘사람’ 장훈에 집중하면 새로운 이야기가 나올 것이란 짐작도 있었습니다. 회당 3~5시간씩 총 다섯 차례 대면 인터뷰를 했습니다. 회차가 거듭될수록 더 진솔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지난 10년을 더 생생하게 그려볼 수 있었습니다.

연작 소설 형식의 시도
기사의 본령은 지켜
약 3개월 중 한 달가량을 내러티브 기사 작성에 할애했습니다(상하편으로 나눈 1회 포함 본편 4편, 번외편 3편). 이전 저희 팀 기사와 비교하면 두 배가 넘는 시간이었습니다. 각자 맡은 원고를 집필하되 여러차례 합평하듯이 의견을 나눴습니다. 길 때는 4시간 동안 ‘빨간펜 첨삭’을 했습니다. 돌아보면 처음 써보는 형식이라 우왕좌왕했던 것 같습니다. 외부의 도움도 많이 받았습니다. 《뉴스 스토리내러티브 기사의 작법과 효과》(박재영 저)를 읽고 또 읽었습니다. 소설과 에세이, 시나리오 등 다양한 형식의 글을 쓰는 김봄 작가에게 자문도 받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팀장의 탈고 덕분에 2만 4,700자(본편 기준)의 긴 글이 일관성을 갖출 수 있었습니다.
나름의 기준들은 이랬습니다. 우선 연작 논픽션처럼 본편 각 회차가 단편으로도 완결성을 갖추되 유기적으로 연결하자. 모두 읽은 후 독자가 적어도 이런 부분은 이해하게 되길 바랐습니다.
▲ 유족들이 10년간 개인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무슨 일을 겪었는가.
▲ 참사 조사를 통해 책임자들은 온전히 책임을 졌는가.
▲ 침몰 원인을 공식적으로 결론 내리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 조사 이후 우리 사회는 안전해졌는가.
▲ 유족들은 왜 정부를 불신하고 시민들은 왜 세월호를 ‘정치적’이라고 여기게 됐는가.
소설 작법을 택했지만 기사의 본령을 지키고자 했습니다. 주관적 표현을 배제하고 팩트 위주로 스토리를 구성하며 실명 보도를 원칙으로 삼았습니다. 최대한 담담한 톤을 유지했습니다. 특정 인물의 목소리로 서사를 전달하지만 그들의 말을 철저하게 사실 검증하려 노력했습니다. 관계자들을 인터뷰하거나 수사·재판과 세월호 조사위원회들의 기록물, 피·가해자들이 쓴 회고록 등을 참고했습니다.
또 흐름상 본편에 넣지 못했으나 꼭 전하고 싶은 인물들의 이야기는 번외편(내러티브 온라인 기사)으로 정리했습니다.
재난 보도에서 내러티브의 의미를 고민하다
<산 자들의 10년>은 내러티브 기사를 중심으로 했으나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일부 인물과 스토리에 집중해 정보가 빈약해질까 우려했습니다. 그래서 팩트로 세월호 참사의 과정을 재정리한 해설 기사, 3명의 안전 전문가와 함께 직접 현장을 찾은 안전 진단 기사도 더했습니다. 영상 <안녕, 나의 동네>와 인터랙티브 <그날의 책임자들 저울은 공정했을까>로 콘텐츠 다양성도 높이고자 했습니다.
지금도 재난 보도에서 내러티브의 의미에 대해 확답을 내리진 못했습니다. 다만 독자들이 재난이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다는 사실을 체감하는 데는 효과가 탁월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철학적이거나 과학적인 문제들에 대한 접근 문턱도 낮아지는 것 같습니다. 불안했지만 해볼 만한 시도였습니다. 그건 세월호 참사를 지난 10년간 놓지 않고 보도한 많은 동료들에게 기댄 도전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저희의 우왕좌왕했던 경험이 사회적 참사를 잘 기억할 수 있는 새로운 시도를 할 동료들에게 조금이나마 용기가 되길 바랍니다. 저희도 잊지 않고 계속 고민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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